그저 벽만 보고 시간만 보내느니 무엇이든

Posted by 트럼프h
2016. 5. 29. 15:06 카테고리 없음

 

 

 

 

 

 

 

 

그저 벽만 보고 시간만 보내느니 무엇이든

 

 

 

 

 

 

 

 

 

해야겠다 싶었을 뿐이다. 나름 곰곰이 생각을 하다 펜을 꼭꼭 눌러 '미래'라고 적어 본다. 입으로 말할 때는 몰랐었는데 막상 적어놓고 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 내게 미래는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흐릿해 당최 손에 잡히질 않았을 것만 같다. 눌러 적는다고 해서 무언가 확실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자리에 똑같은 단어를 적어본다.

몇 번을 덧쓰다보니 뭔가 이어서 쓸 말이 생긴 것 같아 펜을 들었는데, 바깥에서 들리는 불규칙적인 소음이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처음 몇 번은 무시하려 해봤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문을 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나갔다. "이크, ."하는 소리는 짐이나 쌓아둘 줄 알았던 건너편 천막에서 나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러닝셔츠에 골프 클럽을 든 중년의 아저씨가 잔뜩 모양을 잡고 있다.

 

 

 

 

 

 

그는 클럽을 한 번 휘두를 때 마다 힘에 겨운지 소리를 내질렀고 그때마다 천막은 몸을 크게 뒤흔들었다. 나올 때까지 만해도 두고 보자며 별렀지만 막상 그의 모습을 보니 딴죽을 걸기에는 너무 진지한터라 말을 걸 수가 없었다. 흘러내리는 땀이 런닝의 절반을 적시고, 거친 호흡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을 때까지 스윙은 계속됐다. 그는 무릎을 모아 거리를 가늠하고, 부드럽고 길게 치는 것 따윈 생각 않는 듯하다. 나는 결국 끝까지 말 한마디 못해보고 그저 클럽을 휘둘러 천막에 공을 맞히는 그 모습만 지켜봤다.

 

 

 

 

 

 

박세리가 양말을 벗기 전까지 골프는 옥상에서 런닝을 입고 칠 만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녀가 우승하자 전국의 아버지들은 책상에 앉아있던 딸을 골프장으로 데리고 갔고, 공영방송에서도 골프 중계를 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미술, 컴퓨터, 영어, 태권도 학원에 이어서 골프 학원까지 오로지 신분 상승을 위해 자식의 인생까지 투자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렇게 사람들은 골프의 대중화를 외쳤고, 이제는 한 블록마다 스크린 골프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젊은 캐디를 옆에 끼고 나이스 샷을 외치는 사람들은 몇몇의 특별한 사람들뿐이다.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아도, 그들이 꾸는 헛된 꿈은 결국 예감이 좋다며 어머니 속옷까지 뒤져서 돈을 찾아나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별 볼 일 없는 것이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그의 모습을 보며 친근하다고 해야 할지 측은하다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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