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게 병을 보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Posted by 트럼프h
2016. 6. 8. 13:33 카테고리 없음

 

 

 

 

 

 

종이에게 병을 보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종이와 병은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나의 요청을 어쩔 수 없이 들어주겠다는 종이의 툴툴거리는 말과, 고맙다고 말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병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이때까지 짓지 못했던 진심이 가득 담긴 웃음을 지으며, 종이의 바로 옆에 높이가 딱 액자의 끝 부분이 닿는 작은 서랍장을 가져와 그곳에 두고 그 위에 병을 올려두었다. 종이가 병을 괴롭히고, 외롭던 병이 그것을 전부 받으며 웃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어, 그 모습을 하루 내내 지켜보았다.

종이를 찾고 난 지 다섯 달 만에 찾은 그 병을 기점으로, 이때까지 숨어있으며 나오지 않던 많은 수집거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의도하지 않게 자신의 주인에게 떨어져 나와 버려 ‘혼란’에 휩싸인 한 여인의 머리카락. 이때까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아파트 베란다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만 높은 곳에서 떨어져버려 ‘공포’를 느끼게 된 사각팬티. 이때까지 자신을 희생하여 주인에게 기쁨을 주었지만, 자신의 가치가 없어지자 매몰차게 자신을 버린 주인을 원망하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절망’하는 껌 등등.

 

 

 

 

 

많은 수집품들이 방에 하나 둘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고, 기계의 부품밖에 되지 않다고 생각하여 조금씩 사라져갔던 나의 감정도 이들에 의해 조금씩 다양해져 가는 것 같았다. 다양해진 감정에 주위 사람들도 놀랐으며, 수집품들도 자신들 덕분에 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모으던 수집품은 어느새 아흔 아홉 개를 달성하였다. 당연히 나의 마음에는 행복함이 넘치고 있었지만, 조금, 정말로 조금, 아주 조그마한 바람이 있다면.

 

 

 

 

 

종이 이후의 수집품에게서 느끼지 못하였던, 처음 종이를 만났을 때의 그 강렬한 충격을 다시 한 번 더 느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때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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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을 만난 때는 공원의 벤치에서 백 번째 수집품이어야 했었던 반지를 수집하던 중이었다. 사실 백 번째 수집품이니 만큼 거창한 것을 하나 수집하고 싶었지만, 막상 벤치 위에 있는, 병과는 또 다른 ‘외로움’을 지니고 있는 반지를 보자니, ‘같은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수집품들이 반겨 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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