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고 나온 선배가 얼마나 놀랐을까

Posted by 트럼프h
2016. 6. 12. 15:26 카테고리 없음

 

 

 

 

 

샤워를 하고 나온 선배가 얼마나 놀랐을까

 

 

 

 

 

 

메모라도 남기고 올 걸, 하는 생각은 집에 와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났다. 그러나 문득 그 순간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다. 그 시절에도 요즈음처럼 휴대전화기가 있었다면, 선배의 오해가 그리 깊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겨우내 두 팔로 가슴을 싸안고 다녔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고 가슴을 싸안아도 자꾸 속이 시렸다. 내 속에서 빙하가 둥둥 떠다녔다.

내가 그토록 힘겨워하든 말든 자명종시계는 아침마다 잘도 울렸다. 꽃이 다시 피었다. 햇살이 뜨거워졌고, 그늘도 따라서 깊어졌다. 내 상처에도 조금씩 연둣빛 새살이 돋았다.

그 뒤로 나는 아무에게도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

 

 

 

 

 

다음날 점심때에 알프스로 전화했다. 내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여자였다. 여자는 나의 의중을 짚어내자마자 대뜸 내 신상정보부터 캐물었다.

나이가 몇 살이죠?”

내가 서른 후반이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공무원이에요.”

엉겁결에 이 말을 내뱉고 나서, 나는 그렇게 말한 나 자신에게 무척 놀랐다.

내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무래도 어제 본 신문기사 때문이지 싶었다. 그 신문에는 경제 불황의 여파로 맞선 시장에서 남녀가 모두 공무원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적혀 있었다.

 

 

 

 

여자는 계속해서 키와 학벌, 취미 따위를 꼬치꼬치 더 캐물었다. 나는 솔직히 전화로 뭐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물을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실제로 말은 하지 못했다. 말은커녕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그저 그 여자가 묻는 대로 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말았다.

키가 160cm 정도에 4년제 지방대학 졸업이고, 취미가 등산이라고 했죠?”

여자는 내가 한 말을 마치 다짐이라도 받듯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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